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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믿는 사회로 가는 길

우리는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이 국민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헌신하기를 믿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투표한다. 이 신뢰를 저버리는 지도자는 이미 지도자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불신(不信)을 이기고 신뢰를 이 땅에 정착시킬 것인가? 그리하여 보다 원숙한 발전에의 길로 나갈 것인가?


서로 믿는 사회로 가는 길




신뢰의 의미



믿음과 불신을 둘러싼 인간의 드라마는 동서고금을 통해 오랜 역사는 지니고 있다. 정작 믿어야 할 때 믿지 못하고 믿지 말아야 할 때 믿어 버림으로써 오는 인간의 재난은 천차만별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의 한 주인공 오델로는 이아고의 농간에 놀아나 그의 처(妻) 데스티모나를 의심하다 못해 드디어 그녀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맥베드는 마녀들의 예언을 잘못 믿어 임금을 죽이고 끝내는 자신도 맥다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해 성선설(性善說)을 택하든 성악설(性惡說)을 택하든 간에, 어디에서나 자고로 서로 믿는 것은 좋은 일이고 믿지 않는 것은 나쁜 일로 가르쳐 왔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믿음으로 일을 이루는 것(신이성지信以成之)이 군자의 도리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고 ‘남이 나를 속이리라 미리 짐작치 말며 남이 나를 믿지 않으리라 억측하지 말라’(불역사不逆邪, 불억불신不臆不信)고 타이르고 있다. 기독교의 10계명에도 불신의 원인이 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9번째로 들어가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민족의 믿음의 역사이며, 신약성서는 믿는 자에게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있음을 힘차게 강론하고 있다.
성악설(性惡說) 믿었던 순자(筍子)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는 당시의 사회가 혼란해지는 주요 원인을 불신풍조(不信風潮)에서 보아,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요 망국(亡國)의 병이라고 이를 맹렬히 질타하였던 것이다. 그는 특히 사회를 어지럽히는 妖變 6가지에 주목했는데, 그중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믿지 않는 것(부자상위父子相違), 웃 사람과 아랫 사람이 갈라지는 것(상하승리上下承離),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예의불수禮儀不修), 그리고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것(내외무별內外無別)은 다 같이 불신풍조와 깊은 관련을 맺는 것들이다.
信 은 원래 인간(人)과 말(言)이 합쳐져 이룬 표의문자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기가 한 말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은 믿을 만 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 안에는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그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지킬 사람이야”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불신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고 이 상태가 지속될 때 불신이 일종의 습벽을 이루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불신의 유형



불신병(不信病)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매우 저조한 것이다. 셋째는 언제부터인가 ‘조국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지역과 지역 사이의 불신이 가속화된 것이다. 넷째는 민족이 분열되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좀처럼 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말에 대한 신뢰가 일반적으로 매우 저조한 편이다. 말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어찌 보면 불필요한 서류들이 계속 요구된다. 서구사회의 예를 드는 것은 적절치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말로 많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그 곳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이처럼 믿지 않고 서로 같이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한마디의 약속으로 충분한 일을 우리는 흔히 서너번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물건을 살 때 우례 값을 깎아야만 마음이 풀린다. 가격에 대한 불신이 우리의 습성을 이룬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의 불신은 보다 심각하다. 정치인의 말은 더욱 신뢰하기 힘든 것으로 인식된다. 중대한 부정사건과 같은 것들이 터졌을 때 정부의 공식 발표에 대한 사람들의 의혹은 항상 대단하다. 정부정책이 언제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성급히 믿었다간 손해만 본다는 피해의식마저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국가의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한 보기로 필자는 지도급인사들에 대한 국민의 신임 정도를 측정해보려는 설문조사를 1983년 6월에 실시해 본 적이 있다. 표본은 층화(層化)된 임의추출방식에 의존했으며 주로 대전(大田)을 중심으로 한 도시와 농촌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결과 기업인을 신뢰한 사람은 응답자 전체(832명)의 18.4%, 고급공무원을 신뢰한 사람은 21.3%에 불과했다.
세 번째 유형의 불신, 즉 동서(東西)로 표현될 수 있는 지역적 불신도 정치적 불신에 못지않게 심각한 듯이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누구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를 꺼리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우리사회의 치부(恥部)이다. 이 불신은 서울과 지방의 격차와도 깊이 관련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위해 이것은 진정 염려스러운 현상이고 또 해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이것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이것의 정체를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위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마지막의 남북불신(南北不信)은 따지고 보면 분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도 이제 4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생각하면 긴 세월이다. 우리가 규탄하는 일제(日帝)의 식민통치기간보다 길고 이보다 더 파국적일지도 모를 결과들을 수반하는 우리민족의 최대의 비극이 진행 중이다. 우리는 그동안 남북대화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로를 극도로 불신해 왔다. 더욱이나 이 不信病은 오늘날 버마사건이 준 충격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언행(言行)이 일치하지 않는 공산집단의 행동이 우리의 불신을 고조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민족의 화합과 긍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또한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버마사건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시련을 민족화합의 계기로 이끄는 고차원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신뢰회복의 길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말에 책임을 지듯이 남들도 그러하며 내가 건전한 상식으로 행동하듯 남들도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생활의 정신적 뿌리와 같은 것이다. 비록 이런저런 유형의 부정의 사회 안에 퍼진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과 사회질서가 유지되려면 이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마저 파괴된다면 사회는 금방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이 국민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헌신하기를 믿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투표한다. 이 신뢰를 저버리는 지도자는 이미 지도자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불신(不信)을 이기고 신뢰를 이 땅에 정착시킬 것인가? 그리하여 보다 원숙한 발전에의 길로 나갈 것인가?
이에 관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특히 지도층의 인사들이 불신을 조장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만 더 대통령으로 뽑아 주면 그것으로 물러나겠다고 하던 사람이 3선 개헌을 하고 유신을 하는 불미스러운 전통이 깨끗이 불식되어야 한다. 또한 油價를 올리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해 놓고 며칠 뒤에 이것을 전격적으로 인상하는 믿을 수 없는 행동들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첩경은 속임수를 쓰지 않고 말한 바를 행동하는 것뿐이다. 공허한 말을 삼가고 말에 책임을 짐으로써 말의 진실성을 높이는 데 있다. 공자 역시 ‘때에 맞게 말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속임수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不信病으로 인해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정부와 국민사이에, 그리고 남과 북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신은 사실 진정한 대화의 통로가 막혀있거나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의사소통이 단절되거나 기형화될 때, 틈만 있으면 악성유언비어가 활개를 친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신뢰를 상실하고 오히려 비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왜곡되고 과장된 정보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리하여 정상적인 言路에 대한 갈증은 정부와 지도층에 대한 불신으로 파급되고 국민과 정부 사이의 違和感으로 확대되어 국민화합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하게 된다.
대화의 첫 걸음은 물론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화가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에는 말하는 것에 못지않게 듣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서로 이해하려는 쌍방의 노력이 필요하다. 말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고 어떤 관점이나 의사가 미리 선택되어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불신은 이처럼 나의 소리는 차단된 채 남의 소리가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데서 나오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서민의 소리는 어디로 사라지고 권력자의 소리만 장엄하게 울려 퍼질 때 불신은 소외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소리들은 그저 유통될 뿐 사람들 사이에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이 소리에 대한 반향도 있을 수 없다. 즉, 불신은 침묵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대화의 단절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좀처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비판적인 말에는 더욱이나 마음의 창을 굳게 닫는 습벽이 우리에게 생긴 것이다. 그리고 오직 나만의 주장을 내세운다. 틀린 일도 큰 소리를 치며 우기면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가장 큰 상처들로 얼룩져 있는 곳은 오늘날 대학이 아닌가 싶다. 교수도 학생도 더 이상 대학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은 교수를 불신하고 교수 역시 학생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왜 대학을 자율적인 대화의 공동체로 건설해가지 못하는 것일까? 지성이 모인 전당에서 우리는 왜 개인과 개인이 분리되고 집단과 집단이 분열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일찍이 율곡(栗谷)선생은 ‘나라의 흥망이 言路의 열리고 막힘에 있다’(언로개?흥망소계)고 하였다. 공론(公論)을 열어 衆智를 모으는 것이 나라를 살찌게 하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16세기의 율곡선생의 이 말은 불신의 원인과 처방을 간명하게 제시한 뜻 깊은 명언으로서 오늘날도 두고두고 음미해 볼만한 것이다.
세 번째로 지적될 점은 우리 모두를 결속시키는 보다 상위의 상징과 규범의 체계가 확고히 정립되어야겠다는 것이다. 분열과 불신을 막고 우리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전라도냐 경상도냐의 기준보다 한국인에의 귀속의식이 더 강해야 하고, 남쪽이냐 북쪽이냐의 대립보다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에의 의식이 더 높은 수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기준에 의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에 의해 서로 믿어 보고 협력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을 이기는 길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 모두를 귀속시키는 준거틀을 심어주는 작업이다. 우리 모두를 같은 시민으로, 같은 민족으로, 같은 국민으로 혹은 같은 인간으로 보는 상징과 의미의 틀이 필요하다. 조세희의 작품에 나오는 난장이의 딸 영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출생부터 달랐다. ……나의 첫 호흡은 상처 난 곳에 산(酸)을 흘려 넣는 아픔이었지만, 그의 첫 호흡은 편안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물론 극단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암시되고 있는 불신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東과 西, 南과 北을 가로지르는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우리 모두의 결속과 발전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행위의 윤리를 시급히 확립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뢰의 뿌리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민주정치의 실현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목격하는 불신풍조의 핵심에는 뭐니뭐니 해도 정치적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신뢰의 회복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급한 이 시대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약속은 약속으로 반드시 지키고 소신 있는 정치로 국민의 신임을 묻는 정치적 관행이 제도화될 때, 고질화된 불신의 유산이 점차로 극복되지 않을까 전망해 본다.


 
-한국일보(1984년 1월 1일, 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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